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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 오늘의 기념일, 동학 농민 혁명, 전봉준

by 나혼산밍키 2023.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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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이란?

조선후기부터 천주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서양의 종교라며 서학이라고 불렸습니다. 교리와 내용과는 무관하게 서양인들의 종교이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는 나쁜 인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강화도 조약 이후로 조선이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서양인들은 무서운 도깨비라든지 혹은 무서운 존재들 혹은 조선을 무너뜨리려는 오랑캐로 인식되면서 서학에 대한 시선들이 안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학의 교리를 따라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 동학입니다. 1860년 도학, 풍속학, 민간 종교 등에 통달한 경주 최 씨 집안의 몰락 양반 출신 최제우가 경북 일대에서 서학에 대항한다는 뜻으로 동학이라는 이름의 종교를 창단했습니다. 서학을 배척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신분제를 타파한 공평한 세상과 후천개벽이라는 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공평하다는 사상과 토종종교라는 이유로 민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서학이나 동학이나 유학을 거부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1864년 최제우를 처형합니다. 그가 사형되자 그의 수제자였던 최시형이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어 강원도 남부와 충청북도 지역에서 포교 및 신도 관리 업무를 하면서 동학은 한반도 남부와 중부 전체로 퍼지게 됩니다. 몰락양반은 물론 몰락하지 않은 양반들 상당수도 동학에 빠져있었습니다. 조선 개화 무렵 구식군인들의 반란사건인 임오군란, 지식인 개화파들의 쿠데타였던 갑신정변, 조선에 진출하려는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서양인들로 인해 사회는 대단히 불안정해 있었습니다. 최시형은 많은 신도를 전부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포접제도를 도입합니다. 포접제란 교주인 최시형은 충북 보은을 주요 본진으로 삼고 각 지역별로 접주를 두어 담당 지역의 신도를 관리하는 형태입니다. 최시형은 동학이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편안한 종교가 되길 바랐지만 강경파 동학도들은 동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온건파 동학도들은 충청북도에 주로 분포되어 있었고 강경파 동학도들은 전라북도에 분포해 있었습니다. 강경파의 리더는 서장옥이었지만 실제 지휘자는 전봉준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발발

전봉준은 몰락 양반 출신으로 글과 의학,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유독 작은 키로 녹두장군이라고 불렸습니다. 1893년 전봉준이 있는 고부라는 마을에 조병갑이라는 신임군수가 취임합니다. 뇌물로 고부군수 자리를 얻은 조병갑은 탐관오리중에 최고봉으로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전봉준은 강경파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1894년 1월 전봉준은 농민 1천여면을 데리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접수하고 관아를 습격해 접수합니다. 조병갑은 도망을 가고 이 사건은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됩니다. 조선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면 반란주동자들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타협해서 큰 내전으로 번지지 않게 회담을 주도하는 안핵사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고부민란이 터지자 이용태를 안핵사로 파견합니다. 하지만 이용태도 악질 중에 악질로 수사 없이 닥치는 대로 고문하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전봉준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보았고 대접주 김개남과 손화중이 합류합니다. 3 대장이 모여 동학군을 창의군이라 부르며 4000여 명의 동학창의군을 조직해 거병해 봉기하고 안핵사 이용태도 도망을 갑니다. 동학농민운동은 고부를 넘어 부안, 고창, 태인, 금주 등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전라도지사 급에 해당하는 전라감사 김문현이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섭니다. 정읍에서 동학창의군과 전라관군이 붙었고 전봉준의 유인 전에 휘말린 관군은 황토현이란 벌판에서 패하고 맙니다. 그러자 수도에서 홍계훈이 700여 명을 이끌고 파병을 내려오지만 또 한 번 이기게 됩니다. 황토현, 황룡천의 승리고 동학군의 사기는 높아졌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상륙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파병요청을 합니다. 청나라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간다고 일본에 알리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조직해 조선으로 강제로 들어옵니다. 5월 5일 이홍장의 오른팔 정여창이 이끄는 3천명의 청나라 군대가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일본의 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8천 명의 혼성 제9여단이 인천 제물포에 상륙합니다. 일본 측의 돌발행동에 동학농민군과 조선 정부가 당황하게 됩니다. 서로 원치 않는 상황에 이르자 일본군의 조선 철수를 위해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은 적절한 합의점 통해 화약을 맺습니다. 조선정부는 동학군의 요구안을 수용하기로 하고 동학군은 자체 해산하기로 합니다. 동학군은 홍계훈에게 12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모두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전주화약을 통해 사회 개혁에 대한 합의점을 보며 사태는 일단락됩니다. 

청일전쟁

조선에서 철수해야 하는 일본과 청나라는 한국에서 큰 사건을 벌이게 됩니다. 처음에 고종과 조선정부는 정중하게 철수를 부탁하지만 일본군은 서울로 진격해 4시간만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인질로 삼습니다. 그리고 개혁안을 모조리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일본의 주도 하에 새롭게 개혁을 실시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이 개혁이 갑오개혁입니다. 동시에 일본군은 아산만에 정박해 있던 청나라 군함을 기습하면서 청일전쟁이 터지게 됩니다. 조선땅에서 싸우는 청나라와 일본을 보며 전봉준은 비분강개합니다. 1894년 9월 다시 일어나 2차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게 됩니다. 온건파와 강경파가 합류해 4만이 모이게 됐지만 예전부터 근대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기기란 불가능했습니다.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3천 명만이 살아서 도주합니다. 1894년 11월 남은 동학군마저 일본군에게 연이어 패배하고 전봉준과 손병희는 헤어지기로 합니다. 11월 27일 전봉준은 전주성으로 가기 위해 태인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고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동학창의군은 그대로 와해되고 맙니다.

전봉준의 최후

일본병력은 전봉준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전라도와 충청도 마을을 돌아다니며 동학군 색출을 명분으로 수많은 조선백성들을 학살합니다. 이 와중에 몇몇 조선 관리인은 일본의 살육행위를 지지해주고 도와주기까지 합니다. 순창에 숨어있던 전봉준은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됩니다. 전봉준과 손화중 등 주동자들은 사형선고를 받아 교수형 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교수형이라고 합니다. 전봉준과 내통하던 게 발각된 흥선대원군은 일본군에 의해 탄핵당하게 됩니다. 손병희는 3대 교주가 되지만 이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고 쇄신을 위해 천도교로 명칭을 바꾸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존중받는 주체가 되는 나라를 꿈꾸었던 동학농민운동은 현대사로 나아가는 최초의 거국적 대중운동이자 의식 수준이 높아진 평범한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자신의 주권을 외친 미완의 혁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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